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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억제하는 일반 은총

칼빈주의와 학문 [1] [2] [3] [4] [5] [6]

이제 "일반 은총" 교의를 살펴보자. 이는 먼저 제시했던 일반적 원리의 결과이지만, 그 결과는 그 일반적 원리를 '죄'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데서 생겼다.

죄는 우리에게 해결될 수 없는 수수께끼를 던진다. 만일 죄를 하나님께 대적하여 영원한 저주에 이르는 것으로 본다면, 죄인을 "선한 일이라고는 전혀 할 수 없고 죄만 지을 수밖에 없는" 자로 보게 되고, 필연적으로 모든 불신자와 중생하지 못한 자는 마치 불의하고 불쾌한 사람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경험과 전혀 다르다. 오히려 불신 세계는 많은 점에서 뛰어나다.

그래서 사실 죄로 인한 "전적 부패"라는 교의가 언제나 우리의 경험과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이런 경험에서 출발하면 우리의 기독교적 신앙고백은 땅에 떨어지고 만다. 그렇게 되면 인간 본성을 선한 것으로, 부패하지 않은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 중생이 전혀 불필요한 것이 된다.


로마 가톨릭의 잘못된 교리

이런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불신자의 덕을 '찬란한 악덕'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어떤 이는 신자의 죄를 옛 아담에게 돌림으로써 책임을 모면하려고 한다.

로마는 "순수한 자연적인 것(pura naturalia)"이라는 유명한 교리로 좀더 나은 탈출구를 찾으려 했다. 로마주의자들은 삶의 두 영역이 존재하는데, 지상적인 것(순전히 인간적인 것)과 천상적인 것(인간적인 것보다 높은)이 있다고 가르쳤다. 이 이론에 따르면 아담은 하나님에 의하여 두 영역에 대한 준비를 잘 갖추었다. 타락으로 천상적인 것은 잃었지만, 지상 생활을 위한 자연적 능력은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 이렇게 타락한 사람이 자연적인 생활에서 탁월함을 보이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러한 인간론 위에 로마 가톨릭이 서 있다.

로마의 체계에는 두 가지가 잘못되었다. 하나는 성경적 '죄' 개념이 빠져 있고, 또 하나는 그 죄의 개념이 도달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평가 절하로 인한 오류이다. 이것은 그릇된 '이원론'이다.

그 교의에 따르면 성직자는 독신으로 지상적 유대를 끊고 평신도보다 좀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며, 또 지상적 소유를 버리고 자신의 의지를 희생하는 수도사는 윤리적으로 볼 때 성직자보다 좀더 높은 위치에 선다. 더 나아가서, 기둥을 오르며 모든 지상적인 것과 단절된 주상 고행자나 지하 동굴에서 틀어박히는 좀더 조용한 고행자는 최고의 완전에 도달한다.

교회가 찬성하지 않고 돌보지 않는 것은 모두 저급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 입장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지상적 사물의 영역을 연구하도록 권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천상적 영역에 속하는 연구와 명상 외에는 이상(ideal)의 성소를 방어하던 자들을 유혹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전적 타락 & 일반 은총

칼빈주의는 이런 개념에 원칙적으로 반대하였다. 한편으로는 "전적 타락"이라는 죄 개념으로, 또 한편으로는는 "일반 은총" 교의로 타락한 사람 안에 있는 선한 것을 설명했다.

억제되지 않고 구속되지 않은 죄는 그대로 두면 곧 홍수 이전 시대에 보였던 것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인간 생활이 완전한 타락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는 것이 완전히 전멸하지 않도록 죄를 붙드셨는데, 이것이 '일반 은총'이다. 하나님은 이로써 개인의 생활과 전체 인류의 생활과 자연의 생활에 개입하셨다.

하지만 죄의 핵심은 이 은혜로 죽지 않으며, 이 은혜는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하지 못한다. 그러나 야생 짐승을 길들이듯이, 하나님은 '일반 은총'으로 사람 안에서 죄의 활동을 억제하되, 부분적으로는 그 세력을 부수심으로써, 부분적으로는 사람의 악한 영을 길들이심으로써, 그의 나라와 가정을 교화시키심으로써 억제하신다. 그래서 중생하지 못한 죄인도 사랑스럽고 힘이 넘치는 많은 것으로 매력을 갖게 된다. 하지만 죄의 본성은 여전히 해롭다.


악에서 선을 내시는 하나님

악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그것을 그다지 심각하게 부패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에 대하여 '일반 은총'으로 불로 번지지 않도록 막으시는 하나님께 그 덕을 돌린다. '일반 은총'은 거친 물결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안전하게 도착하도록 나룻배를 이끄는 고리줄과 같다. 하나님은 이처럼 악을 억제하신다. 악에서 선을 내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칼빈주의자는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비난하는 일에 결코 게으르지 않지만, 우리를 질서정연한 사회에서 살게 하시고 개인적으로 두려운 죄에 빠지지 않도록 도우시는 하나님께 찬송하며 감사한다. 그리고 인류에게 감추어져 있는 모든 재능을 드러나게 하시고, 일상적인 절차에 따라 인류의 역사를 발전시키시며, 지상 교회가 발디딜 자리를 확보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창조 질서에 새겨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탐구

하지만 이 고백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삶에 대하여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한다. 왜냐하면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도 하나님께 속하며 이 둘에서 '최고의 경영자와 건축가'의 걸작을 탐구해야 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칼빈주의자는 잠시라도 다른 학문을 저급하다고 여기면서 불신자에게 맡기고는 신학과 명상에만 전념하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모든 작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며, 모든 지적 능력을 다하여 천상적인 사물뿐만 아니라 지상적인 사물을 연구한다. 그리하여 자연과 인간 산업의 생산물에서, 인류의 생활에서, 사회학과 인류의 역사에서 창조 질서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보도록 부르심을 안다.

인류의 역사는 중앙에 십자가를 두고 진행하는 일관된 과정임이 분명하다. 이 과정은 모든 국가가 나름대로의 사명을 가지고 진행하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 대한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복의 원천이 될 것이다. 주위의 자연 생활이나 인간 생활의 모든 것이 탐구할 만한 대상이 되어, 그로써 가시적 현상과 불가시적 작용으로 나타나는 전체 우주의 영광에 새로운 빛이 비치게 할 것이다.

물론 이 노선을 따르는 철저한 학문적 지식의 과정이 종종 교만에 이르며,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가장 심오한 탐구자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범죄한 죄인으로 여기고, 세상 일에 대한 찬란한 깨달음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고 여길 수 있는 것은 이 영광스러운 '일반 은총' 교의 덕분이다.

[계속 글이 이어집니다.]

요약/편집 : 나쥬니 (nazun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