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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원리적 갈등에 대한 해결

칼빈주의와 학문 [1] [2] [3] [4] [5] [6]

칼빈주의는 학문의 원리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사소한 충돌에 골몰하지 않고 곧바로 인간 의식으로 돌아간다.

모든 학자는 자신의 의식으로서 이 인간 의식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의식은 사물의 비정상적 특성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지 않다. 어떤 사람에게는 죄의식이 매우 강하고 힘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약하거나 전혀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신앙의 확실성이 중생의 결과로 분명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의 증거가 크게 울려 퍼지고, 다른 사람은 그 증거를 전혀 듣지 못했다고 선언한다. 죄의식, 신앙의 확실성, 성령의 증거, 이 세 가지는 모든 칼빈주의자의 의식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정상론자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는 자기의 의식을 강요하려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의식이 자신의 의식과 동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신의 의식과 다른 사람의 의식이 실제로 다를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하는 순간, 사물의 정상적 조건은 허물어진다.

반대로 칼빈주의자는 자신의 의식이 정상론자 안에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칼빈이 주장하듯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종교의 씨(semen religionis)'가 있고, '하나님에 대한 느낌(sensus divintatis)'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칼빈의 체계가 믿는 사람의 인간 의식과 믿지 않는 사람의 인간 의식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죄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없으며,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신앙의 확실성을 가질 수 없으며, 성령의 증거가 없는 사람은 성경을 믿을 수 없다. (참조.요3:3;고전2:14)


두 종류 의식의 차이점

이렇듯 의식의 단절을 모르는 정상론자(비중생자)가 있고, 단절과 변화에 대한 경험을 갖는 비정상론자(중생자)가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의식을 원초적 진리로 삼는다. 그리고 모든 학자는 학문을 이 의식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논리적 결론은 일치할 수 없다. (중생과는 상관없이) 정직한 학자는 전체 우주에 대한 학문적 건물을 자신의 의식에 주어진 근본적 자료와 조화를 이루도록 세워야 할 의무를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러한 칼빈주의적 해결책에서 학문은 평가절하되거나 무시되지 않으며, 전체와 모든 부분으로서 우주를 위하여 요구된다. 정상론자의 학문과 비정상론자의 학문의 차이는 탐구의 상이한 결과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종류 의식의 차이점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자유롭지 못한 학문의 부작용

자유로운 학문은 이 두 종류의 인간 의식의 공격을 막는 거점이다. 정상론자는 우리의 의식이 자신의 의식과 동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의 의식에서 믿고 바라는 그밖의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말하며, 자기 기만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상론자가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잘 구축된 학문을 세울 수 있는 자유를 공격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권리와 자유 역시 보호하려고 한다.

그런데 시대적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오래 전에는 모든 대학에서 비정상론의 입장을 모든 학문의 공리로 보았다. 오히려 소수의 정상론자는 교수직을 얻기가 어려웠고, 박해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정상론자들은 상황을 주도하여 모든 영향력을 통제하고 더 많은 교수직을 차지하고 있다. 그 결과 비정상론자는 공적 위치에서 내쫓기고 있다.

전에는 우리가 그들을 문밖으로 내쫓았는데, 이제는 그들이 우리를 거리로 내몰고 앙갚음을 하고 있다. 그래서 최후 소송에까지 승리할 수 있는 용기와 인내와 힘이 훨씬 높은 수준에서 기독교 학자에게 있는지가 문제가 된다.


정상론자들에 맞선 기독교 학자들

정상론자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우리 보기에 거룩한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일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모든 기독교 학자는 이 싸움을 피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자신의 학문적 양심을 위하여 낙담의 불평을 하거나, 신비적 감정을 붙들거나, 비신앙고백적 활동을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원리에 따라 사유하고, 이 원리의 노선에서 모든 학문적 탐구를 새롭게 하며, 자신의 힘있는 연구를 학계가 받아주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겠다는 강렬한 자극제를 얻어야 한다.

우리가 반대자에게 세속 학문을 맡겨도 아무런 위험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신학을 건지려고만 한다면, 우리의 전술은 어리석은 타조의 전술이 될 것이다. 집이 온통 불타고 있는데 윗층만 건져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결국 모든 학문은 원리의 대립과 다소간 연관되고 따라서 원리의 대립에 틀림없이 개입한다. 기독교 학자가 현실에 대하여 눈을 감는 것으로 안전을 조금씩 추구할 때, 아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거기서 안전한 방패를 발견하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현실을 자신의 학문에서도 통합되어야 할 사실로 기록해야 한다.


학문의 자유는 결국 진리를 승리로 이끈다

그런데 지금의 많은 대학은 학문이 하나의 동질적 인간 의식에서만 발전하며 학문과 능력만이 전문 교수직을 차지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한다고 가정하고 있다. 아무도 원리의 근본적 차이 때문에 두 노선의 대학이 서로 대립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상론자와 비정상론자의 범세계적 갈등이 불거질수록 대학 생활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칼빈주의의 요구에 따라 교회와 국가가 자신의 권위를 대학 생활에서 제거하면, 이 학문 영역에서 대립 원리의 지지자들이 평화롭게 분리되어 정직한 진보와 상호이해가 보장될 것이다. 역사는 이러한 분리가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증거하는데, 로마 제국의 '하나의 국가'라는 이념이 몰락했을 때 유럽의 숨어있는 정치력이 발전하였으며, 로마 제국의 몰락 후 유럽의 '하나의 세계 교회'라는 이념이 추방되었을 때 그리스도인들에게 좀더 높은 발전으로 나아가는 길은 열렸다.

학문의 피상적 통일성은 오래지 않아 깨지고, 학문은 분열될 것이다. 다양한 학문 영역이 일어날 것이며, 다양한 대학이 번창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학문에서 체계를, 교훈에서 일관성을, 교육에서 통일성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자유로운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원칙에 엄격하게 매여있는 한 모든 부자연스러운 속박에서 벗어날 힘을 갖는다. 칼빈주의가 우리에게 열어준 학문의 자유는 결국 승리하게 될 것인데, 첫째로 모든 주도적 가치관이 자신의 원리로부터 학문의 추수를 거둘 수 있는 충분한 힘을 보장함으로써 그리할 것이며, 둘째로 자신의 결론에 힘을 실어주는 원리를 감추려 하는 학자들에게 학문의 이름을 주지 않으려 함으로써 그리할 것이다.

요약/편집 : 나쥬니 (nazuni.net)